부끄러운 벚꽃 문화 축제 민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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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6-04-06 04: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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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한국전쟁 동란중에 진해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설립되어 충무공의 얼과 뜻을 기리자는 뜻에서 추모제가 시작되었고, 1962년 지역 활성화 방안으로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벚꽃축제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이 식민지 시대때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없애기 위해 새로 깔은 신작로 가에 벚꽃을 많이 심었다는 사실도 있다. 일본 사람들은 벚꽃놀이를 유난히 즐겼고, 나라 시대부터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24년 아사쿠사라는 곳에 벚꽃을 심어 벚꽃놀이가 일반화되어 1684년에는 무사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벚꽃놀이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있다.

청일전쟁시기 일본군이 마산과 진해에 왕벚꽃나무를 심었지만, 막상 일제시기에는 이런 벚꽃축제가 없자 해방후인 1952년에 벚꽃축제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군항제가 식민잔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 중요한 것은 벚꽃은 일본의 국화라는 점이고, 진해는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관음포(큰 별이 떨어졌다 하여 이락포라고 바뀌었다.)에는 이락사와 유허비가 있었는데, 이락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본가인 아산에 가기 전의 유해가 있던 곳이다.

근데 중요한 점은 진해는 일제식민지때 만들어진 방사선 계획도시였다는 점이다. 진해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 개의 광장이 있는데, 중원광장은 거북선 모형과 분수 시계탑을 북원광장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남원광장에는 이순신 장군의 시비가 있다는 점이다. 태양은 일본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여기에 모셨다는 것이다.

더구나 더욱더 개탄스러운 것은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할때 일이다. 이순신 장군을 조각한 당대의 최고 조각가인 윤호중씨가 맡았는데, 당시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없어 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데 이를 조사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 집안은 물론이요, 당대 권위가들에게 물어다녔다는 데, 그 권위가라는 사람들은 바로 최남선, 이은상, 김은호였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친일파들이었다. 최남선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지은 작가이자, <3.1운동선언문>을 기초한 인물이지만, 친일행위로 반민특위에 잡힌 경력이 있었고, 이은상은 만주국 신문인 <만선일보>에 활약했고, 김은호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활약을 찬양하는 그림을 기린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들이 과연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나타내겠으며, 그들이 자문한 이순신 동상은 진해뿐만 아니라,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에까지 미쳤으니, 이순신 장군이 차고 있는 칼이 일본칼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사실은 아닌 셈이다.

물론 벚꽃 축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을 기리기 보다 벚꽃에 더 관심이 쏠리리는 축제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이제와서 벚꽃나무를 다 잘라낼 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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