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달마'님이 <<a href=http://www.rekorea.or.kr/ target=_blank>새정치연대</a>> 자유토론방에 올린 글입니다. 달마님의 허락을 받아 <민주통신>에 전재합니다. 달마님께 감사드립니다.

▲ '진보와 그의 적들' 표지
합리적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는 말 그대로 '래디컬(radical)'하지 않고 '프러그레시브(progressive)'한 것이다.
노 정권 들어서 우리는 대단히 급진적 경험을 했다. 노 정권의 국정 수행 전략의 본질은 보수 대 진보로 전선을 형성해 구체제 지도권 층을 완전히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많은 이분법적인 발언으로 갈등이 야기된 것은 그들의 이런 기본적인 전략에 기인한다.
탄핵 때를 한 번 되돌아보자. 그들은 방송 삼사를 동원해 직접 국민에게 호소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것은 민의를 거스르는 것으로 쿠데타라고 했다.
민주주의는 법과 절차에 따르는 것이고 탄핵은 적법절차에 따라 행해진 적법한 민주적 행위였다. 이를 민의에 유리된 것으로 규정해 친노대 반노의 대결구도를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몰고 갔다.
이런 설명으로는 그들의 급진성을 분명히 전달할 수 없어 그들의 이런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을 하나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위험성의 본질은 민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있다.
탄핵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층 자녀의 이중국적 취득으로 병역을 기피한다는 폭로가 있어 세상이 시끄러웠는데 그게 바로 그것이다. 그 때 각종 게시판에는 국민의 이름으로 이들을 처단하자는 인민재판식의 섬뜩한 글들이 줄을 이었다. 거의 혁명의 분위기 아닌가.
민의가 무엇인가. 노무현도 '여론은 생물이다.‘라는 말로 인정하다시피 수시로 변하는 것이 민의이다. 이 수시로 변하는 민의로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정의인가.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이런 내용의 글을 한 게시판에 올리자 어떤 네티즌은 나의 민의는 '리걸 픽션(legal fiction)'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인민재판은 '일리걸 픽션(illegal fiction)'이라고 맞받아 그들의 위험천만한 민의해석에 대항했다.
비단 이 사건뿐만이 아니다. 노 정권 들어 친노의 생각이 곧 민의로 둔갑하는 대단히 위험한 혁명적 상황들은 수시로 벌어졌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런 행위들은 지배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천박한 급진적 상황에 어떻게 진보라는 위장을 씌울 수 있단 말인가. 진보란 절대 천박한 급진이 아니고 글자 그대로 '스탭 바이 스탭(step by step)'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평통 미주 자문회의에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국민이 왕과 같이 되는 것이 진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사적 유물론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변증법에서부터 출발한다. 변증법의 핵심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진리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진리에는 한계가 없다. 절대 진리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이 이상론에 불과함을 잘 엿볼 수 있고 또 이 점에서 인간과 문화의 한계를 설정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칸트와 큰 차이가 있다.
이 이상적인 헤겔 변증법의 정반합의 과정을 비판한 사람은 아도르노로 그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것은 변증법으로 절대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했다. 즉 정이 반과 만나면 반드시 합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정과 반이 만나 정이 될 수도 있고 합이 될 수도 있고 반이 될 수도 있다. 조금 더 치밀하게 접근하면 마이너스 합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반드시 절대 진리에 이르지 않을 수 있고 또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는 법칙이 충분히 깨어질 수도 있다.
물론 구체적 사건에서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은 부정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역사는 지식의 누적으로 진보의 길을 걷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한계 없는 법칙이 존재하지 않듯 역사적 진보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함이다.
물론 그 한계는 지식의 실용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 실용성의 의미는 지식이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투입요소보다 산출요소가 더 커야 한다는 데 있다. 산출보다 투입이 클 때는 이미 그 지식은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이 지점에서 역사는 진보의 과정을 중단한다.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다시 칸트로 회귀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헤겔을 비판했다. 하이데거는 헤겔의 변증법은 세상의 모든 요인을 동일성의 원칙으로 포섭하려 하는 억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이 동일성에 포섭되지 않는 차별성도 존재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헤겔의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 부르고 자신의 철학을 차별성의 철학이라 불렀다.
그러나 동일성으로도 세상의 현상을 모두 재단할 수 없고 차별성의 철학으로도 또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의 타자성의 원리는 동일성의 철학에서 탈피한 차별성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 성 소수자들의 동성 결혼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와 같은 소수자들의 권리 인정을 위해 차이의 인정을 요구하는 현상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차별성의 인정 요구는 동일성의 철학인 헤겔의 변증법이 안고 있는 위험과 동일하게도 자칫 유의미한 가치를 파괴하면서 세기말 현상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요인을 안고 있다.
변증법적 급진주의자는 변증법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한계에 부닥쳐 이제 차별성의 급진론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차별을 인정하자.’라는 참여 정부의 새로운 홍보 문구에 경계의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현상들로 미루어 보건대 나는 급진성은 어떤 이론과 관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원래 모순 없는 이론은 없는 법이다. 다만 급진론자들이 그들의 당위 확보를 위해 어떤 이론이든 이론을 원용하려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그래서 나는 급진성을 이론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성향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급진론자 들이 진보의 옷을 입고 있으면 그들은 급진 진보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그들이 어떤 이론의 옷을 입고 있든지 간에 원래가 지적이지 못하고 천박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합리성과 동떨어져 있다. 즉 진보와 급진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의 연결조합이다.
그러므로 합리적 진보는 이들에게서 위장으로서의 진보를 그들의 천박한 급진성에서 회수함과 동시에 본래의 진보의 가치와 한계를 명명백백히 밝혀 국민들로 하여금 이들과 전혀 관계 없는 진보의 가치를 수용 발전시키고 또한 이들의 이상성과 천박함에 기만되어 역사를 망치는 일을 방지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진보활동의 가장 본질적 내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장기표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합리적 진보'에 대한 고민의 일단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시간나는 대로 진취적 보수에 대한 개념도 곧 고민하고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독자분들의 합리적 충고를 기다립니다. / 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