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기사는 이명호님의 <<a href=http://blog.ohmynews.com/hotzone/ target=_blank>레인메이커의 HOT ZONE</a>> 블로그에 실린 글로, 이명호 님의 허락을 받아 <민주통신>에 전재합니다. 이명호님께 감사드립니다.
의료사고피해구제법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대체로 ▲입증책임의 전환 ▲분쟁조정위원회 설치 ▲조정전치주의 ▲무과실의료사고 배상제도 ▲형사처벌 특례의 다섯 가지로 압축된다.
▲ 입증책임의 전환
의료소송은 대부분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소송으로 진행된다. 이 경우, 기본적으로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할 책임은 원고인 피해자에 있다. 하지만 관련 증거와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가 있는 피해자가 의료진의 과실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의료소비자 시민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은 '입증책임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이기우 의원의 안에서는 이를 법조항에 명시하고 있지만, 의료계 일부에서는 이로 인해 의료진의 방어진료가 늘어날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 분쟁조정위원회 설치
의료사고 발생시 피해자들은 마땅히 하소연 할만한 데가 없다. 또한 전문기구가 없어 의료사고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법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해자 단체는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와 분쟁을 구제, 조정하기 위해서는 의사측에 버금가는 전문성을 갖춘 중립적 조직의 설립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이기우 의원의 안에서는 ‘의료사고피해구제위원회’를 독립된 법인으로 설립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새로운 조직 신설을 전제로 한다는 문제가 있다. 행자부와 기획예산처 등의 부처에서는 예산상의 문제를 들어 구제위원회 설치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법무부는 사고원인을 신뢰성 있게 규명한다면 별도의 조정위원회는 불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독립법인을 설치하기보다는 정부 산하의 ‘의료사고 조사전달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주장한다.
▲ 조정전치주의
의료분쟁이 소송으로 이어질 경우 최종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일반적인 민사소송이 6~7개월 걸리는 데 비해 의료소송은 평균 2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이러한 장기간의 법적 공방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감소시키고 피해자에 대한 신속한 보상과 재판으로 인한 의료행위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미국, 독일 등 많은 나라에서 의료분쟁을 소송 대신 조정을 통해 처리하고 있다.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이러한 조정절차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는 것을 ‘(필요적) 조정전치주의’라 하며, 조정과 소송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임의적 조정전치주의’라 한다. 이기우 의원의 안은 후자를 채택하고 있다. 법조계는 필요적 조정전치주의가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의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기존에 일부 행정청에서 인정되던 필요적 행정심판전치주의도 대부분 사라져가고, 국가인권위법 등 조정제도를 도입한 여타 법률도 임의적 조정제도로 운영되는 마당에 조정전치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는 것.
필요적 조정전치주의가 도입될 경우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이중의 금전적, 시간적 비용을 부담하게 될 수도 잇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법조계에서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선 피해자들이 조정 결과에 불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처한 여건에 따라 조정과 소송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의료계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임의적 조정제도를 운영할 경우 지금과 마찬가지로 소송이 남발되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조정절차 도입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당사자가 조정에 불복할 경우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헌법상 권리인 재판청구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 무과실의료사고 배상제도
무과실의료사고에 대한 국가의 보상과 형사처벌 특례 규정의 설치는 의료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의원의 안에서는 의료인이 최선을 다해 진료했음에도 환자의 특이체질 등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가 발생한 경우 국가가 대신 배상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대부분의 이해 당사자들이 동의하고 있지만, 기획예산처와 법무부는 국가의 책임을 설정하게 되면 자기의 과실이 있는 경우에만 책임을 진다는 민법상 과실책임주의를 위배하게 되고, 현실적으로 많은 의료사고가 무과실로 판정되고 있어 국가의 재정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를 들어 이 조항에 반대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의료사고가 과실과 무과실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많아, 이에 대한 구제가 없을 시 피해구제법에 의한 분쟁해결 기능이 취약해 질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 형사처벌 특례
대부분의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민사소송과 형사고발을 동시에 제기한다. 피해자가 보상보다는 과실 의료인에 대한 처벌을 우선적으로 원하는 경우가 많아, 형사고발 건수가 민사소송 제기 건수 보다 5~6배 이상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발로 인해 의료인이 실제 기소 당하는 경우는 약 8.8%에 불과하지만, 피해자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경우엔 형사처벌 여부에 관계없이, 정보의 상대적 불균형에 놓여있는 피해자들이 공권력의 힘을 빌려 민사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는 현실적인 목적으로 의료인을 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목적의 무분별한 형사고발을 막기 위해 이의원의 안은 의료인이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범했더라도 종합보험 또는 종합공제에 가입되어 있고 특정 중대과실로 인한 사고가 아닐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반의사불벌죄) 하는 ‘의료인의 업무로 인한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특례’를 규정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의료행위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생명을 살리고자하는 선의의 목적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특례조항이 포함되어야만 안정적 의료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료 분쟁이 형사사건화 했을 경우, 과실의 유무가 판명날 때까지 해당 의료인은 수차례의 소환조사를 받으며 강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부담이 과잉진료 또는 방어진료를 조장하고, 사고위험이 높은 외과 계열의 전공 기피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취지는 좋지만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위험 사업장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다고 안전관리자의 형사처벌이 면제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등의 원칙을 위배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반의사불벌죄를 도입한 국내의 다른 법률을 보면, 이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특정 범죄유형에 적용되는 것으로 특정 범죄주체에 따라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의료인이라는 특정직군에게만 해당되게 되면 평등권 침해를 논쟁을 충분히 불러 일으킬만 하다. 또한, 외국에 유사한 사례가 없고,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서도 과실치상 까지만 인정할 뿐 치사에까지 특례를 주고 있지는 않다. 보건복지위 검토보고는 이 문제에 대해 '죄를 지으면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국민의 법감정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도입에 신중 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해 당사자간 첨예한 대립... 심지어 정부 부처간 대립도
의료사고피해구제법은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제도가 시행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을 뚫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료 사고의 직접 당사자인 피해자와 의료계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 부처간에도 법리 해석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어내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할 국회는 지금까지 여기저기 눈치보기에 급급해온 모습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피해자들이 정치인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더 이상의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어서 빨리 법을 만들어 주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번 임시국회 회기에도 법률안 처리 전망은 불투명하다. '사학법'이라는 국민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슈가 이번 6월 임시국회 최대의 현안이기 때문이다. 극한대립으로 또다시 국회가 공전 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회는 이제 갈림길 위에 섰다. 이번만큼은 법제정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다른 이슈를 놓고 싸우면서, 피해자들의 아우성을 강건너 불구경 하듯 듣고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