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민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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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6-08-05 02: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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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초에 1주일간 한국비림박물관과 하얼빈시 서법가협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한중서화 100인전’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해서 하얼빈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지난 5월 한국비림박물관을 방문해서 허유 관장으로부터 비림박물관의 의의와 전망에 대해 설명을 듣고서 한국에 제대로 된 비림박물관이 하나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한국비림박물관의 한중서화 100인전

‘비림’이란 쉽게 말해서 비석을 모아놓은 것인데, 그 속에 한민족 5천년 역사에 면면이 이어온 정치, 경제, 교육, 외교, 군사, 문화, 종교, 습속 등이 글씨와 그림과 조각의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으니 후손들의 역사교육, 정신교육에 더없이 좋은 교육장이 될 것으로 믿어졌다. 허유 관장의 이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 비림박물관의 건립을 위해 자기 모든 것을 바쳐온 그의 예술혼과 민족혼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이번에 하얼빈을 방문하게 된 것은 서화전도 서화전이지만 하얼빈시와 흑룡강성은 안중근의사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인 데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곳이라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갈 형편이 되지 못해 가지 않으려 했지만 허유 관장이 중국 측과의 약속 때문에 꼭 가야 한다고 해서 마지못해 가게 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여행을 하고 보니 대단히 보람 있는 여행이었기에 몇 자 적어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우리 일행은 모두 8명이었는데, 모두가 상당한 식견을 갖춘 분들이라 여행이 한결 편하고 유익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나온 것도 여행에는 역시 친구가 좋아야 함을 말해 줄 것이다. 아무리 짧은 기간이고 또 볼거리가 많아도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행이 재미없을 수 있는데 다들 좋은 분들이어서 대단히 다행스러웠다.

하얼빈역의 안중근기념관


▲ 안중근의사의 반신상 및 단지한 손
우리가 중국에 도착해서 느낀 첫 소감은 이제 중국이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얼빈 또한 한국의 대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구 600만 명에 조선족이 약 13만 명 정도 된다고 했다.

하얼빈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안중근의사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을 방문했다. 역무원의 안내를 받아 역 구내에 들어갔더니 저격할 당시 안중근 의사가 권총을 쏜 곳과 이또오 히로부미가 서 있던 곳을 표시해둔 표지판이 있었다. 조형물이 아닌 데다 글씨마저 새겨져 있지 않아 아쉬움이 컸으나 그런 표지판을 만들어둔 것만으로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념코자 하는 뜻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역 구내에서 불과 5-6m 거리에 있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쏘았으니 저격 후 곧 바로 체포될 것은 너무나 분명했고, 체포되면 곧 이어 죽게 될 것 또한 분명했는데도 그렇게 했으니 과연 안중근 의사였다.

곧바로 역사 2층에 있는 하얼빈역 박물관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안중근의사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박물관 중앙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깜짝 놀랐다. 불과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독지가가 안중근의사의 동상을 세웠는데 중국당국이 철거를 요구해서 동상을 철거했다는 신문기사를 본 일이 있어 중국이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할 수 없게 하는 줄로 알았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겉으로는 소수민족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수민족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는 나라여서 그렇게 하는가 싶었다. 특히 한국이 만주를 고구려 땅이라 하여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으로서는 만주와 한국의 관계를 되도록 차단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기념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일이 있는 터라 하얼빈역 박물관 중심부에 별도의 방을 설치해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만들어둔 것을 보고서 너무 놀랐다.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고 그 신문기사를 본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런 착각을 했을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하얼빈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중국을 크게 오해할 뻔했다.

그러면 그렇지 비록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한국침략의 원흉이기도 하지만 중국침략의 원흉이기도 한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람을 중국정부가 경원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중국인들의 많은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의사가 그런 거사를 중국 땅에서 단행할 수 있었을 테니 중국으로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지언정 안중근의사가 외국인이라 해서 경원하지는 않을 일이었다.

다음날 조선 민속문화예술관을 방문해서 서동철 관장의 설명을 듣고 안 일이지만, 중국정부가 안중근의사의 기념사업을 꺼려하는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포함된 조선 민속문화예술관 건립에 많은 지원을 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안중근의사 동상이 철거된 것은 백화점주인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상업적 목적으로 동상을 건립했기 때문이었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을 중국정부가 싫어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사람의 동상을 마음대로 건립할 수 없듯이 중국도 관련법규에 따라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 같았다.

그동안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정부의 고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공산주의 국가이다 보니 공산주의자 영웅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지 그 밖의 영웅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은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자랑스러운 조선민속문화예술관

하얼빈 도착 다음날 중국공산당 하얼빈시위원회 장소량(張少良) 선전부장 초청 만찬장에서 안중근기념관이 불과 며칠 전(7월1일) 개관했다는 말을 들었다. 자기도 그 전날 가 봤는데 아주 잘 만들었더라고 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기념사업을 하고 있다는 말을 별로 들은 바 없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그런 곳이 있구나 싶었다. 다음날 전시회 개막식을 끝내고서 곧 바로 그곳으로 가보았는데 앞에서 말한 조선 민속문화예술관 안에 안중근기념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백 여 평의 공간에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서동철 관장의 말로는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했으나 그만하면 일품이었다.

중국 땅에 안중근기념관이 이토록 훌륭하게 건립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다행스러웠다. 그곳 조선 민속문화예술관은 6층 건물로 연건평이 약 2천 여 평 된다고 했는데, 문화 ․ 예술 공간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하얼빈시 당국의 많은 지원이 있었다고 했고, 한국정부의 지원이 있기를 바랐다. 한국정부가 지원했으면 싶었다. 혹 국가기관이 할 수 없으면 민간차원에서라도 지원했으면 한다. 우리 민족의 옛 풍속을 보존하고 있다는 데서 중국에 살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는 강렬한 민족혼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훌륭한 민속문화예술관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동철 관장의 집요하고도 헌신적인 노력 덕분인 것 같았다. 재정사정으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고급자재로 잘 꾸며져 있어 한민족으로서 대단히 자랑스러웠다.

서동철 관장은 중국정부로부터 최상급의 문화훈장을 받았다는데, 잠깐 보아도 그 사람의 훌륭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동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특히 그런 사람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다행스러웠다.

문화교류야말로 한중관계의 정신적 토대

다음날 태양도(太陽島)라는 곳에 있는 전시장에서 ‘한중서화 100인전’ 개막식이 있었다. 태양도라는 곳은 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송화강으로 둘러싸인 섬인데, 서울의 여의도와 비슷했고 신시가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산은 없지만 숲이 우거져 있었고, 송화강을 건너가는 다리가 참으로 일품이었다.

개막식에는 중국 쪽에서 섭운준(攝云浚) 하얼빈시 부시장과 장소량(張少良) 중국공산당 하얼빈시 위원회 선전부장이 참석했다. 장소량 부장은 전날 밤 우리 일행을 만찬에 초청한 사람이었다. 의전 상으로는 부시장이 중국 측을 대표했으나 당서열에서는 선전부장이 더 높다고 했다. 장소량 부장은 준수한 용모에 활달하기도 해서 앞으로 고위직을 맡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중국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상당한 실세라고 했다.

전시장을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이었는데 중국의 다른 조형물에 비하면 대단히 작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대식 건물로 아담하게 지어져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행사안내원으로 나온 아가씨들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날씬한 몸매에 예쁘긴 했으나 키가 너무 커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출품자들을 비롯해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화전 개막식이 있었다. 중국 측에서 섭운준 부시장과 장소량 선전부장이 축사를 하고 한국 측에서 허유 관장과 내가 축사를 했다. 이날 축사에서 말한 대로 한중간의 외교관계, 경제교류도 중요하지만 문화교류야말로 한중 관계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한중서화 100인전의 한국 측 행사는 지난 6월 중순 충북 보은에 있는 한국비림박물관에서 있었다. 이날 중국 측에서 중국 개봉시에 있는 한원비림박물관의 창건인이자 중국문화훈장의 하나인 ‘당대문화우공(當代文化愚公)으로 뽑힌 이공도(李公濤) 선생과 중국 하얼빈시 서법가협회 홍철군(洪鐵軍) 주석 등 11명이 참여했었다.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어 허유 관장과는 대단히 친밀한 사이였다. 중국에서 오신 손님들의 접대를 허유 관장이 도맡아서 하는 것 같았다. 경비도 많이 들겠지만 그 많은 분들을 십 여일 가까이 접대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수고 덕분으로 우리가 지금 중국에 와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공도 선생의 한국비림박물관 지원

허유 관장이 한국에 비림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이공도 선생 덕분이라고 했다. 허유 관장이 중국을 수 십 차례 드나들면서 중국 개봉시에 있는 한원(翰園)비림박물관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현재의 한국비림박물관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많은 작품들이 이공도 선생의 지원으로 전시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이공도 선생은 한국비림박물관의 명예총재로 추대되어 있는데 앞으로 한국비림박물관이 제대로 건립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분의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오천년 역사를 한 장소에서 알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후세인들로 하여금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갖게 할 비림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한국 사람이 아닌 중국 사람이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으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공도 선생이 한국의 비림박물관 건립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허유 선생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애정 때문인 것 같았다. 서예는 물론 비림문화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를 통해 한중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허유 관장의 인품에 감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공도 선생 자신도 한국의 비림박물관 건립에 대한 지원을 통해 한국과 중국이 다함께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데 기여할 초석을 하나 놓고 싶어 했다. 축사에서 그것을 밝힌 바 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현재로서는 원만하지만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사 왜곡에다 북한 문제의 처리 등으로 얼마든지 그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민간인들이 형제애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누면서 서로 상대방을 지성껏 돕는 것은 한중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오랜 기간 한중문화교류를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해온 허유 관장과 중국 측 관계자들의 선구적 역할은 대단히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허유 관장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본격화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한중국교도 정상화되기 전인 1989년도부터 한중문화교류를 위해 중국을 내왕했다는데,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교통편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중국행 직항로가 없었음) 말도 잘 안통하고 문화도 틀려 의사소통이 어려웠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진실되고 진지한 것으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했으리라 싶기는 하지만 그 어려움이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회주의 국가인 데다 북한과의 관계도 있어 자칫하면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히 생명을 건 중국 방문이었을 것이다. 허유 관장의 이런 희생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중서화 100인전’이 열리고 있음은 물론 한중간의 관계가 이만큼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 선각자의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15년 전의 약속을 이룬 아름다운 전시회

개막식과 테이프 절단식을 마치고 장소량 부장, 섭운준 부시장과 함께 작품을 관람했다. 홍철군 주석, 허유 관장 등 주최 측 주요 인사들의 작품 앞에서는 글귀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사진도 찍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특히 이건화 부주석의 매화그림 앞에 왔을 때 이건화 부주석이 전시회가 끝나면 그 그림을 나에게 보내주겠다고 해서 박수가 터졌다. 그날 밤 그림과 서예 출품자들과의 만찬에서 안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협회의 주석이나 주요 간부 이외에는 전업작가들이 없는 것 같았다.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출품작을 애호가들에게 파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시해 두었다가 친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것 같았다.

이날 제출된 작품 가운데는 15년 전 허유 선생과 함께 강가에서 술을 마시며 언젠가 작품전을 열 것을 약속했었는데 오늘 이런 서화전을 열게 되니 감개무량하다는 뜻의 글씨를 써서 제출한 작품이 있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약속을 지키기 어렵거늘 각기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한 약속을 지켜 국제서화전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할 일이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만주벌판을 지나 상지시로

우리는 4일간 하얼빈에 머문 후 닷새째 되는 날 비림박물관이 있는 상지로 갔다. 가는 동안 만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2시간 동안 달렸는데 끝없이 작물을 심은 밭이었다. 작물이 잘 자라고 있는데,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상지에서 해림으로 갈 때는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지만 전반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지 궁금했으나 알기가 어려웠다.

상지시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상지시 부시장과 상지비림박물관의 하수령 관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미 한국에 다녀갔던 하수령 관장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겠으나, 상지시가 앞으로 한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한 때문인 것 같았다.

오찬은 조선족 식당에서 하게 되었는데 보신탕을 대접하려고 해서였다. 상지시장 초청의 오찬이었는데, 부위별로 나온 개고기 요리도 일품이었지만 닭고기요리, 양고기요리 등 너무 푸짐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음식 대접을 받았는데, 내게는 고문이었다. 음식의 나라 중국답게 외국인으로서도 조금도 거북스럽지 않게 맛이 있었으나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을 정도로 음식을 내놓아도 되는지, 이러고도 앞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겠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 고맙기보다 밉기까지 했으나 그것은 그들의 문화요 습관이었다. 문화요 습관이라고 해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음식을 많이 남길 정도로 내놓아야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남기는 음식의 양에 따라 손님 접대의 수준이 결정되는 듯했다. 대단히 부적절한 관습으로 꼭 고쳐졌으면 싶었지만 수 천 년 동안 지속된 관습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 또한 분명했다.

오찬 후 상지빈관 곧 상지시 영빈관으로 갔는데 상지시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특히 우리 일행이 들어간 방에는 모두 잘 차려진 과일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우리 일행을 얼마나 극진히 대접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의 경우 가는 곳마다 거실이 딸린 스위트룸을 배정받았는데 함께 여행한 분들께 죄송했으나 사양하기도 어려웠다. 대표라고 해서 특별대접을 하는 것이어서 죄송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림박문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다

오후에는 상지비림박물관을 방문했다. 이번 여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선지의 하나였다. 대단히 잘 조성되어 있었다. 직사각형으로 약 1만평 정도의 넓이였는데, 사방은 회랑으로 둘러져 있고, 회랑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다. 회랑이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도 작품을 전시하기에는 더없이 좋아 보였다.

박물관 한가운데 항일전쟁영웅 조상지(趙尙志) 장군의 석상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중국에는 항일전쟁을 기리는 조형물이 대단히 많았다. 이 박물관 안에도 항일전쟁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전시관이 설립되어 있었다. 7.31 부대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지만 과거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데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항일의지를 다지기 위한 뜻도 담고 있는 것 같아 좀은 걱정스러웠다. 일본의 침략정책은 단호하게 반대하고 이에 저항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본과 함께 평화와 번영을 누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어야지, 일본과는 적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본의 침략정책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협력을 파괴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교과서 왜곡도 그것을 분명하게 반대하고 규탄하며 시정을 촉구해야지만 그 반대와 규탄이 국수주의 곧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초하고 있어서는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 왜곡을 바로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과거에는 설사 침략과 약탈의 역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평화와 번영을 함께 누려야 하는 터에 앞으로도 침략과 약탈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교과서 왜곡은 옳지 않다고 설득해야 효과적일 것이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침략 당한 것을 규탄할 뿐 만약 우리가 힘이 강해지면 상대방을 침략할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규탄에 힘이 실릴 리가 없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더 효과적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 중국이야말로 중화사상에 기초한 패권주의 국가이다. 중국의 한민족만이 문화민족이고 그 밖의 나라들은 야만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도 과거에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고정불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중국도 변하게 되어 있음을 감안하여 중국과 함께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실천한 문화교류는 한중간의 이러한 평화와 공동번영을 이루는 데 정신적, 인간적 토대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상지비림박물관에는 항일전쟁의 영웅들을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 공산당정권의 정책적 의지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니라에도 이런 비림박물관이 있었으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도 장엄했지만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돌붓과 돌인장 등 기념조형물도 볼만 했다. 돌로 조각된 것인데 세계에서 가장 큰 붓이요 인장이라 했다. 그럴 것 같았다. 특히 용(龍)자를 1000자가 넘게 건물의 벽에 써 붙여 두었는데,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 같은 글자를 1000가지 이상의 다른 글씨로 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어 대충 비교해보았는데, 같은 글씨는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의 작품이 많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浩然之氣와 허유 관장의 德香萬里도 돌에 새겨져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회음벽(回音壁)이 있었는데, 실제로 말소리가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것 같지 않은데 북경의 어느 공원에도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시간 넘게 관람을 하였는데, 관람하는 동안 내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비림박물관을 하나 건립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을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상지비림박물관의 경우 전시작품과 박물관 안의 조형물들은 대단히 좋았으나 우선 위치가 시가지와 붙어 있는 데다 산이나 강을 끼고 있지 않아서 마치 예술조각품들을 한 군데 모아 놓은 듯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현 위치에서 더 확장할 것이라는데, 그렇게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많은 비용을 들여 조성한 것이라 박물관 전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확장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산과 물이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서울의 우면산 기슭에 지여져 있는 예술의 전당이 터를 잘못 잡았듯이, 예술 작품은 그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시하는 장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술의 전당도 비용이 더 들더라도 새로운 장소에 새로 건립해야 하듯이 상지의 비림박물관도 그 자리에서 확장하기보다 다른 곳에 새로 건립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하기야 시내에 있으면 수시로 드나들 수 있어 좋을지도 모르겠기에 내 생각이 반드시 옳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물관의 넓이는 크게 확장되어야 할 것 같았다. 역사적 유물을 고증하러 오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휴식을 위해 오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는 점에서 휴식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박물관 안에 있었으면 싶었다. 가족이 함께 와서 산책도 하고 다과도 즐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림박물관을 건립할 때에는 이런 점을 크게 참고해야 할 것 같다.

자매결연을 바라는 상지지 당국

저녁에는 상지시 서기 초청의 만찬이 있었다. 상지빈관 곧 영빈관 안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잘 꾸며진 식당이었다. 상지시 서기와 시장, 부시장 등 상지시 고위 간부 전원이 참석한 듯했다. 어디를 가나 좌석이 서열에 따라 정해졌다. 만찬 초청자와 피초청자 대표가 가운데 앉고 그 옆으로 서열대로 좌석이 배정되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미리 좌석을 배정하는 사람이 나와 있어서 자리를 정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략 서열을 지키기는 하나 중국은 그것이 철저했다. 아마 공산당문화에 기인하는 것 같았다.

이날 만찬을 하면서 상지시 서기는 상지지를 간단히 소개하고 우리에게 한국의 어떤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상지시 인구는 약 60만 명이고 이 가운데 조선족은 약 8만 명이라고 했다. 상지비림박물관 하수령 관장이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이지만 상지시 차원에서 한국에 제대로 된 비림박물관이 건립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도 했다. 아주 좋은 일이다. 상지시가 조각 기술을 가진 석공들을 지원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상지시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곳일 뿐더러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살고 있어서 문화교류와 더불어 경제교류를 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앞으로 한국비림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도움도 받고 한중우호도 다지기 위해 상지시와 자매결연을 맺을 도시를 수도권에서 한 곳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동포의 정을 나눈 노래방

만찬이 끝나고는 그곳 김창희 부시장의 안내로 노래방으로 갔다. 노래방에는 상지시 조선족 중학교 교장선생과 세 분의 여선생이 우리를 접대하러 나왔다. 조선족 중학교는 학생수가 1300명 정도 되는데 교사 수가 80명 정도 된다고 했다. 김창희 부시장의 말에 의하면 이성근 교장은 아주 유능한 분이라고 했다. 40대 초반에 교장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유능함을 알 수 있었다.

이국 땅에서 동포를 만났으니 담소나 했으면 싶었으나 만찬 때 술을 많이 마신데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 때문에 담소를 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그래서 곧바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대로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면서 동포의 정을 한껏 나누었다. 나는 바로 이곳 만주벌판에서 꼭 부르고 싶었던 ‘광야에서’를 힘차게 불렀다.

찢기는 가슴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에 핏줄기 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마침 여선생들이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아무래도 노래 잘 부르는 선생을 뽑아서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여선생 가운데 김OO라는 선생은 자기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조카라고 했다. 다소 의외였으나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니 그러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말씨가 북한 말씨 그대로인 데다 성격도 북한 사람 같이 보여 정말로 김정일 위원장 조카인가 싶었다.

노래방 아가씨들을 부르지 않고 조선족 동포 선생님들을 부른 것은 동족을 만난 기쁨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포의 정을 나누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술이 많이 취해서 자칫하면 실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데다 절제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도 있겠다 싶어 일찍 끝냈다. 헤어져 나오는데 김창희 부시장이 2차를 가자고 제안했으나 사양했다. 김 부시장도 예의상 제안한 것이지 꼭 2차를 갈 생각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날 나는 술자리에서였지만 상지시 인근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의 현황을 듣고, 앞으로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역할이 대단히 큼을 강조했다. 중국 땅에 와서 살게 된 사연은 다양할 것이다. 또 중국 땅에 살면서 겪은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국의 입장에서 보거나 조선족 동포의 입장에서 보거나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의 중국 진출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은 물론 한중우호를 돈독히 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에 조선족 동포들의 국내 잠입이 문제가 되고 있을 때, 중국 동포들이 고국으로 와서 돈을 벌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사람들이 공짜로 돈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큰 벌이도 아닌 노동을 하고서 벌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조국이 할 일이 아니다. 조선족을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꼭 같이 취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중국이 시장경제로 진입하던 초기에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서 돈을 벌어 가면 중국에서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한국정부의 엄청난 실책이요 또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대오각성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김창희 부시장, 이성근 교장, 세 분 여교사와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동포의 정을 나누면서 조선족의 발전과 더불어 한중우호의 강화를 위한 일을 함께 할 것을 다짐한 것은 대단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노래방 노래 소리가 시끄러워 체계적인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이러한 뜻을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상지시와 한국의 어떤 도시가 자매결연을 맺게 되면 이러한 뜻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해림시로

다음날은 조찬을 마치고 곧바로 김좌진 장군의 유적이 있는 해림으로 가게 되었다. 조찬 때에도 서기와 시장이 식당으로 왔다. 극진한 성의 표시였다. 헤어지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돌아올 때에도 부시장과 하수령 관장이 톨게이트까지 전송을 나왔다. 이분들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상지에서 두 시간 정도 가니 해림시였다. 오는 동안 중국에서는 드문 일로 계속해서 산이었다. 그런데도 터널도 하나 없이 평평한 길이었다. 스케이트장이 유명할 정도로 상당한 높이의 산들이 많았으나 길은 아주 좋았다. 도로공사를 하는 곳이 많아 서행할 때가 있었으나 막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차량 통행이 대단히 적었다.

해림시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해림 시장과 김좌진 장군의 유적이 있는 산시진(山市鎭) 서기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인사도 건넴이 없이 곧바로 우리 일행을 안내해 갔다. 해림 시가지를 지나 산길을 따라 약 30분간 달렸다. 산길이라고는 하나 오르막 내리막은 하나도 없이 평평했다. 다만 도로가 좁았고 농촌지역이었다. 해림시에 김좌진 장군 유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해림시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해림 시장이 안내를 하니 어련히 잘 알아서 안내할까 싶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막상 도착해서 보니 김을동 여사에게서 듣던 바와는 달랐다. 김을동 여사로부터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라고 하면 여러 측면에서 거부반응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 ‘한중우의공원’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찾아온 곳은 김좌진 장군이 살던 옛집을 복원해 놓은 곳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이 우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마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동상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신 노고를 기리면서 앞으로 한중우호를 돈독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실 것을 기원했다. 한중우호를 돈독히 하는 것은 조국의 발전에도 더 없이 소중한 일이지만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복리를 위해서도 대단히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

시공을 초월한 독립운동가의 새 역할

나는 안중근 의사나 김좌진 장군 등 독립 운동가들이 지난날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 역할을 했지만 이제 중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함과 아울러 한중우호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영웅은 시공을 초월하여 민족과 세계에 기여하는구나 싶었다. 특히 조선족이 많이 사는 북만주지역에서 독립투쟁을 한 독립지사들은 과거에 한 역할 못지않게 현재와 미래에도 큰 역할을 할 것만 같아서 존경심이 더 컸다.

특히 김좌진 장군은 항일무장독립투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 그것이 현지 주민 곧 조선 동포를 위시하여 중국인들의 많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할 때 ‘김좌진 정신’이야말로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정신자세이기도 했지만 한중우호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정신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을동 여사가 김좌진장군 기념관(백야관)을 건립하면서 ‘한중우의공원’으로 한 것은 김좌진 정신을 잘 살린 명칭으로 보인다.

집안을 둘러보고는 관리인을 찾았다. 대문간에 사람이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 물어볼 만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관리인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때라 시장이 우리 일행을 서둘러 식당으로 안내하려 했다. 무척 아쉽고 석연치 않았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김을동 여사가 분명히 ‘한중우의공원’을 건립해 두었고, 김좌진 장군의 기념관만 건립해둔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 모두의 기념관을 건립해 두었다고 말했는데, 그런 것은 없이 김좌진 장군의 유품만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김을동 여사한테 잘못 들었는가 싶었다. 내가 김을동 여사한테 ‘한중우의공원’의 청사진을 들은 것을 착각한 것 같이 여겨졌다. 해림 시장과 산시진 서기가 먼 길을 안내해서 찾아온 곳이니 더 이상 의심하기가 어려웠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중국 사람에게 묻기가 창피스러워 더 묻지도 못했다. 사실 김좌진 장군의 옛집을 전혀 꾸며놓지 않았다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으나 김좌진 장군의 옛집을 상당 정도 돈을 들여 잘 꾸며놓은 데다 해림시장이 안내를 하니 그러려니 하고 믿은 것이 결국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여사가 전 재산을 투입해 건립한 김좌진 장군 기념관인 ‘한중우의공원’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 번 더 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려니 생각한다.

독립운동가에 진 빚이 너무 부끄럽다

세상 살아가면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 많지만 그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근황이나 별세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도 찾아가보지 못한 것이 크게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다. 안중근 의사나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상해임시정부 등의 유적을 일찍이 찾아보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분들의 의로운 투쟁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감사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유적지들을 둘러보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김좌진 장군 유적을 찾은 것은 나의 이런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다.

얼마 전 김을동 여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들었는데 여러 측면에서 독립운동가의 자손다워 존경스럽기도 하고 또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특히 그 분이 아버지(김두한 선생)가 없다시피 한 가정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저만큼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하기야 위대한 독립운동가 ‘장군’의 손녀요 ‘영원한 야인’의 딸이니 왕대밭에 왕대 난다고 그만한 인물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참으로 부끄럽게도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니 김을동 여사가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김을동 여사는 이날 강의시간에 독립운동가 자손답게 독립군가 한곡을 열창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군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정의의 날센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기리 너와 나로다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여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내리 너와 나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보세


김을동 여사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 곧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 대단하셨던 것 같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는 생명조차 부지하기 어려웠던 일제하에서 남편이 피살된 후 방물장수로 가장하여 피살지인 만주 산시진(山市鎭)까지 가서 유골을 수습해다가 친정댁이 있는 충남 보령에 산소를 모셨다고 하니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다. 무시무시한 일제치하에서, 그것도 교통편이 거의 없던 때에 그 멀고도 먼 만주까지 가서 죽은 남편의 유골을 수습해왔으니, 그것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심만이 아니라 민족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충남 보령군과 홍성군 사이에 김좌진 장군 묘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내 생각에는 이런 여걸을 낳은 보령에 묘소를 두는 것이 맞을 듯싶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찾지 못해 묘지조차 없는 것을 생각하면 김좌진 장군 부인의 억척스러운 행보가 더없이 값진 것을 알게 된다.

다시 갈 수밖에 없는 한중우의공원

마리(馬里) 해림시장과 기려굉(紀麗宏) 서기의 안내로 김좌진 장군의 옛집에서 불과 2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했다. 시간이 늦지 않았다면 해림시내로 가서 좋은 음식점으로 모시려 했는데 점심시간이 너무 지나 가까운 식당으로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우리로서는 김좌진 장군의 옛집 근처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오히려 더 잘 되었다는 말을 했다.

농촌 지역인데도 먹을 것이 너무 많이 나왔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듯싶었다. 시장이 왔다고 식당에서 신경을 더 쓰는 것 같았다. 맥주가 나왔는데 지금까지 마셔본 맥주 가운데 가장 맛있었다. 아마 물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

마리 시장은 시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해림시에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상부의 지시로 우리를 안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날 김좌진 장군에 대한 한국민의 존경심이 대단하다는 것, 앞으로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이 많이 이루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한중우호관계가 돈독해졌으면 한다는 것 등을 말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대화 가운데 마리 시장과 기려굉 서기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음을 알고 좀 의외였다. 김을동 여사에게 이야기해서 이 분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으면 싶었다.

우리는 적어도 4시간은 걸릴 하얼빈까지 가야 하는 관계로 곧바로 김좌진 장군의 옛집이 있는 산시진을 떠나야 했다. 마음 같아선 자주 오고 싶지만 세상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어서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만주벌판에 김좌진 장군을 홀로 두고 떠나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뒤가 돌아다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이곳까지 와본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마음 한구석엔 자긍심도 있었다.

해림 시장과 산시진 서기가 우리를 또다시 톨게이트까지 안내했는데, 그 고마움에 보답할 기회가 있어야 하겠다.

음식으로 세계를 제패한 나라의 진수성찬

하얼빈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었다. 만주벌판을 종횡무진 누빈 기분이었다. 다소 피곤했으나 뜻 깊은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얼빈시 사회과학원장 초청 만찬이었다. 만찬장으로 갔는데 어마어마한 식당이었다. 도대체 식당이 어떻게 이렇게나 클 수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크기도 했지만 대단히 호사스러웠다. 음식도 일품이었다. 음식으로 세계를 제패한 나라답게 요리솜씨가 대단했다.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었다면서 바다가재를 내놓았는데 중국 돈으로 70위안 한국 돈으로 약 5만 원 정도 된다고 했다. 과용이다 싶었고 분에 넘치는 일이었지만 이미 나온 음식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소 시장하던 터라 속전속결로 음식을 거지반 먹었을 때쯤 하얼빈 공과대학 부총장 일행이 찾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그 시간에 회의가 있게 되어 무리한 줄을 알면서도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복평(王福平) 부총장에다 장소매(張素梅) 국제합작처 처장, 그리고 조선족 동포로 하얼빈공대 교수로 있는 홍병용(洪炳鎔) 박사가 함께 왔다. 허유 관장과 교분이 많은 홍병용 박사가 만남을 주선한 것 같았다.

왕복평 부총장은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 같았다. 나이는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열정과 활기에 넘쳤다. 하얼빈공대를 간단히 소개하고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하얼빈공대 명예교수가 되고서 곧바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서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대꾸할 말이 없었지만 그의 말솜씨가 뛰어난 데에는 저어기 놀랐다. 장소매 처장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을 한 사람답게 대단히 세련되었다. 같은 장씨를 만났다며 한국에 장씨가 많으냐고 물어 여덟째로 많다고 했더니 중국에서는 장씨가 제일 많다고 했다. 이씨가 제일 많은 줄 알았다고 했더니 장씨가 전체 중국 인구의 약 8%로 가장 많다고 했다.

안중근 장학회가 없어져서야

함께 온 홍병용 박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학자적 기풍이 몸에 배어 있었고 민족적 열정이 대단히 강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를 위해, 그리고 한중우호를 돈독히 하기 위해 지금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을 듯싶었다. 왕 부총장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그런 취지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귀국해서 홍병용 박사에게 고맙다는 인사전화를 했더니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돈독히 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하얼빈공과대학에 ‘안중근 장학회’를 설립해서 운영해왔는데 지금은 자금이 고갈되어 장학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안타까웠다. 한국이 그만한 여유는 충분히 있는 터에 안중근 장학회의 기금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장학회가 있는 줄을 잘 몰라서 그렇지 그것을 안다면 장학금을 내놓을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사실 우리로서는 하얼빈에 장학회를 만들 명분이 없어서 못 만들지언정 안중근 의사 같이 좋은 명분이 있는데 이를 놓치는 것은 민족적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안중근 장학회가 잘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왕복평 부총장 일행이 먼저 자리를 뜨고 우리는 포해춘(鮑海春) 사회과학원장과 담소를 더 나누었다. 내가 엉뚱한 사람이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덕분에 좋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로 나의 미안함을 덜어주었다. 그날 밤 택시로 호텔에 오려는데 기어이 자기차로 데려다줄 정도로 자상한 분이었다. 사회과학원과 대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학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사회과학원은 당에 소속된 전문기관으로 당이 필요로 하는 정책을 입안해주는 곳이라 했다.

이날 우리는 731부대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김성민씨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이미 허유 관장으로부터 그의 연구 성과와 인품에 대해 많이 들었던 터라 그분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사회과학원에서 731부대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는데 바쁘기 그지없다고 했다. 그의 연구에 기초해서 731부대 복원공사를 했다고 하니 그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업을 한 것이다. 그 사람의 인품으로 보아 능히 그런 일을 해낼 만했다. 참으로 성실하고 겸손해 보였다.

이날도 술을 많이 마셨다. 하얼빈대 팀까지 합석을 했으니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 술은 도수가 대략 50도 정도는 되어 굉장히 독했지만 금방 깨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술에 취하면 다음날 아침까지 술기운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 술은 아무리 취해도 그날 밤 12시 전에 깨서 좋았다. 그동안 점심 저녁 가리지 않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술 때문에 여행에 지장이 생기지 않은 것은 그만큼 좋은 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석유 도시 다찡의 의전문화

다음날은 마지막 행선지인 다찡(大慶)으로 갔다.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는 큰 경사가 났다고 해서 다찡이라 부른 것 같다. 조찬을 끝낸 후 짐정리를 하는데 호텔 사장이 선물을 주었다. 삼베로 짠 이불감인데 상당히 고가의 물품 같았다. 허유 관장과의 친분 때문이겠으나 나로서는 감사하기보다 미안한 생각이 더 들었다.

다찡으로 오는데 초원이 장관이었다. 사막성 기후 때문이거나 지하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곡물이 자라지 못해 놀리고 있는가 싶었는데, 정작 다찡에 와서 물어 보았더니 기후나 토지 때문에 놀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별 이유 없이 놀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두 시간이나 달릴 동안 마을다운 마을 하나 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놀리고 있으니 대국 중국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찡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정문의(鄭文義) 사장을 비롯해서 다찡시 정부 관계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분들의 안내를 받아 다찡 영빈관에 도착했다. 곧바로 영빈관 접견실에서 상견례를 가졌다. 큰 홀에 의자가 대각선으로 놓여 있었다. 통역이 앉는 자리까지 감안하면 영락없이 무슨 국가원수 정상회담 하는 장소 같았다. 이곳 다찡은 중국 최대의 유전이 있는 곳이라 국빈급 손님이 많이 오기 때문에 영빈관과 접견실을 잘 꾸며놓은 것 같다.

중국 측에서 후배원(忽培元) 부시장이 환영사와 더불어 다찡시를 소개하는 말을 하고, 한국 측에서 내가 인사말을 했다. 후배원 부시장은 이곳은 비가 잘 오지 않는데 오늘 귀한 손님이 오면서 비를 몰고 왔다면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다찡에는 약 5만개의 유정이 있는데 다찡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양이 중국 전체 석유 생산량의 약 40%이며 중국 최대의 유전이라고 했다. 이 유전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왕진희(王進喜)라는 분인데 중국에서 영웅으로 추앙한다고 했다. 그분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으나 많은 시행착오를 하면서 힘겹게 유전을 찾아냈을 것 같다.

환영행사가 끝나고서 곧바로 오찬장으로 갔다. 넒은 홀 한 가운데 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역시 진수성찬이었다. 다른 곳보다 더 고급스러웠다. 음식의 종류나 질도 더 고급스러웠지만 식탁이나 접시 등도 더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아주 격조가 높았다. 예의와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행동에 묻어났다. 아마 의전교육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오후에는 다찡 유전박물관을 관람했는데 너무 전문적인 것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관람객도 많지 않았다. 더욱이 비가 와서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관람을 대충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찡시가 물에 잠긴 듯했다. 갈 때는 안내자가 길을 잘 몰라 한 시간 정도 헤맸는데 올 때는 도로가 물에 잠기고 길이 막혀 굉장히 오래 걸려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차안에 있을 시간이 많아 나를 수행한 다찡시 서법가협회의 조초(趙超)라는 젊은이와 필담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했다는데 아주 똑똑했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서법가협회에서 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글씨를 잘 쓰는 것 같았다. 다찡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임금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약 2000위안(한화로 약 16만원) 정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다찡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인 자기 고향에서는 한 달에 약 1000위안 정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다찡시에 아파트가 많이 건설되어 있는데 국가소유는 거의 없고 모두 개인 소유라고 했다.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모두 개인 사업가가 짓고 있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돈으로 사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많지 않은 월급을 받아서 어떻게 그런 아파트를 살 수 있는지 궁금했으나 말도 잘 안 통하는 데다 그 젊은이도 잘 모를 것 같아 물어보지 못했다.

한중우호를 담은 족자선물

호텔에 도착해서 모처럼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곧바로 만찬시간이었다. 만찬은 상수림(常樹林) 다찡시 부서기 초청이었다. 상수림 부서기는 몽골족으로 얼마 전까지 내몽골자치주에서 근무하다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몽골족답게 한국인과 여러모로 닮은 데가 많았고 한국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냈다. 아마 한국인이 몽골족에서 나왔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이날 만찬 또한 푸짐했다. 특히 술을 많이 마셨다. 상수림 부서기가 대주가였다. 잔을 계속해서 비우는데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술은 빨리 깨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상수림 부서기는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서예에 대해서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지만 정치정세에 대단히 밝았다. 공산당 간부답다고 할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발사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에 대해 그는 북한이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문의 사장이 내게 ‘天道酬勤’이란 족자를 하나 써주어서 내가 그것에 대한 답으로 접시에다 ‘天皇不負’라고 썼더니 상수림 부서기가 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더니 ‘天皇不負’보다 ‘皇天不負’라고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착각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논어에 ‘皇天不負’라고 써져 있어 그것이 옳다고 하고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天皇’이라고 하면 일본천황을 가리키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히 큰 것 같았는데, 공산당 간부들은 대체로 그런 것 같았다.

이날 만찬에는 서문평(徐文平)이란 젊은이도 참석했는데 아주 유능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언젠가 다시 볼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만찬이 끝나면 우리 일행만의 대화시간을 좀 가졌으면 싶었는데 정문의 사장이 노래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거절할 수 없어 부득이 따라갔다. 정문의 사장은 사업을 하면서 서예를 하는 분인데 사업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서예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우리 일행 모두에게 일일이 족자 글씨 선물을 했다. 밤새 글씨를 썼나 싶었다. 한국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한중관계를 긴밀히 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우리가 간 노래방은 우리나라의 단란주점과 꼭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젊은 아가씨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너무 어린 사람들이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들의 하루벌이를 우리가 망칠 수는 없었다. 함께 노래를 몇 곡 부르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한 여행을 마무리하며

여행을 끝내는 날인만큼 우리끼리 담소시간을 갖기로 했다. 호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평가회를 겸해서 여행소감을 말하기로 했다. 다들 아주 좋은 여행이었다고 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았으나 융숭한 대접에다 보고 들은 것도 많고 특히 우리 나름으로 한중우호를 다지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특히 하얼빈시 정부에서 우리 여행일정에 따라 해당 관청에 우리를 돕도록 지시를 해서 우리가 극진한 대접을 받도록 한 것이 인상적일 것 같았다.

내가 이번 여행을 정리해서 몇 가지 말을 했다.

우리가 이번 여행에 동참한 동기는 다양할 수 있다. 한중서화전을 통해 한중간의 문화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참여한 분도 있을 수 있고, 그냥 중국여행의 기회가 있다고 해서 동참한 분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허유 관장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마지못해 동참한 분도 있을 수 있다. 어떤 동기나 인연으로 이번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건 우리는 한중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한중간에 외교, 경제 등의 분야에서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문화교류를 통해 정신적 유대가 강화되어야 그러한 교류와 협력이 더 잘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한중서화 100인전’은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우리들이 많은 중국인들을 만나 우의를 돈독히 한 것은 한중우호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민족적 차원에서도 대단히 값진 여행이었다.

더욱이 한중간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동북공정’을 통해 북한을 영구히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만주지방은 지난날 고구려 영토였던 데다 지금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으니 한국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국민들이 많다. 이런 것은 모두가 패권주의적 발상이요 국수주의적인 발상으로 사리에 맞지 않다.

고구려가 우리나라였다고 해서 고구려가 차지했던 땅 모두를 우리나라 땅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옳지 않거니와 고구려가 중국역사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고구려 영토를 중국영토로 간주하려는 것도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결국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중국영토였던 때도 있고 한국영토였던 때도 있는 땅을 어느 때를 기준으로 다시 국경선을 정할 수 있겠는가? 사리에 맞지 않고 분쟁적인 이런 의식을 없애야 한국과 중국이 함께 평화와 번영을 누리면서 다 같이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가는 곳마다 이런 입장을 밝혀온 이번 여행은 대단히 소중한 기회였다고 본다.

한중우호의 토대가 된 선구자의 혼과 땀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민족적으로 유익한 민간외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허유 관장이 1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구축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다고 중국 측에서 그토록 융숭한 대접을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받은 대접은 직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형성된 진정한 우애와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허유 관장이 쏟아 부은 열정과 비용이 실로 엄청날 것이다.

우리는 허유 관장이 그동안 쏟아 부은 열정과 비용에 힘입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뜻 깊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한중간에 국교가 정상화되고 지금과 같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허유 관장과 같이 오랜 기간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한중간의 우의를 다져온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발전에는 다수 민중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한두 사람 선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 내가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에 비해 특별대접을 받은 데 대해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더욱더 고마웠다. 나로서도 특별대접을 받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중국이란 나라가 원체 의전을 중시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아무래도 나일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허유 관장을 비롯한 일행 여러분께 깊이 감사한다. 앞으로 응분의 보답이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보람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허유 관장의 오랜 지기인 홍철군 주석의 헌신적인 노고가 있었기 때문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홍철군 주석은 인간적으로도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정치적 판단이 뛰어나고 대외교섭력이 대단히 탁월함을 절감했다. 중국 관리들이 우리를 그토록 극진히 대접한 데에는 홍철군 주석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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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표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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