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용훈 대법원장
이용훈 대법원장의 발언이 물의를 빚고 있다.
이 원장은 일선 법원을 돌면서 ‘법원이 재판모습을 제대로 갖추려면 검사의 수사기록을 던져버려야 한다’든가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라는 것이 대개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다’든가,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 동안 법원은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했었다’면서 ‘그때 법정에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지금 국정을 움직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우리 법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원장의 이런 발언을 두고 검사와 변호사들이 이 원장을 규탄하면서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어 법원과, 검찰, 변호사가 패싸움을 벌이는 양상이다.
이런 양상을 두고 언론은 대체로 이 원장의 발언이 표현상 부적절한 점은 있지만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가운데 나온 실언 정도로 보는 편이고, 상당수 국민들도 이 원장이 표현이 거칠기는 하나 검찰의 횡포와 변호사의 사기성을 속 시원하게 잘 지적했다고 보는 것 같다.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검찰과 변호사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고, 권력기관끼리의 다툼은 대체로 국민을 위해서 나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국민의 이런 인식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면 이 원장의 발언은 과연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한 것일까?
어떤 주장이 신뢰를 얻으려면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려면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할 만한 자격과 인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정의의 실현과 국민의 권익 보장을 위한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할 만한 자격과 인품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공판중심주의의 강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으로서 사법부의 수장이 되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사람인 동시에 국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사법개혁을 추진할 사람이 아니겠기 때문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1967년부터 2000년 대법관직을 마칠 때까지 약 34년간 법관생활을 했는데, 그의 말대로 ‘법원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해 있던 때에 그도 법관생활을 했지만 그가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어떤 일을 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주로 민사사건을 맡음으로써 직접 민주화운동을 단죄하는 재판을 적게 할 수는 있었겠으나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그대로 따랐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지금 와서 자기는 책임이 없는 양 지난날 사법부가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질타하는 것은 위선의 극치일 뿐이다. 더욱이 지난날 법원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난하는 것을 통해 다시 사법부를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으니 위선을 넘어 또 다른 권력의 시녀화일 뿐이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아래에서 법관생활을 했다고 해서 모두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법관이 모두 민주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법에 대해 저항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성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지난날의 행적을 부끄러워하고 자성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행세하면서 집권세력에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위선을 넘어 불의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사독재시절에는 군사독재에 순응해서 출세하고 민주시대에는 민주세력에 아첨해서 출세하고 있으니 어찌 기회주의의 전형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 원장은 2000년 7월 대법관직을 마친 후 곧바로 변호사개업을 해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사건과 16대 대통령선거 무효소송사건에서 노 대통령 측 변호인을 맡은 인연으로 2004년 10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노 대통령 측 변호인을 맡거나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을 맡은 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을 변호했거나 현직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부고위직을 맡았다면 이런 사람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할 사법부의 수장이 되는 것은 전혀 적절치 못하다. 그가 민주법치국가에서의 사법부 위상을 제대로 알았거나 사법부 독립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이라도 갖고 있었다면 이미 대통령 편에 섰던 경력 때문에 대법원장직을 사양했어야 옳다. 대통령 편에 서서 변론을 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부고위직을 맡은 사람이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된다는 것은 이미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는 일이 되겠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고서는 국민의 권익 또한 보장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용훈 씨가 대법원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사법개혁 운운하는 것은 연목구어일 뿐이다.
노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대법원장이 된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하자마자 현정권과 코드를 맞추기에 바빴다. 사법부의 과거사를 정리하겠다고 한 것은 그 전형이다. 이번에 ‘7,80년대에 법정에서 노래부르고 한 사람들이 지금 국정을 움직이고 있고, 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우리 법원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 발언도 다분히 현 집권세력에 대한 아부이자 현 집권세력으로부터 신뢰받는 법원을 만들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니, 집권세력으로부터 신뢰받는 법원이 되어서는 사법정의의 실현도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도 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이 원장의 이번 발언은 사법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이 원장이 ‘밀실수사로 만들어진 검사수사기록을 던져버리라’든가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라는 것이 대개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발언이 공판중심주의와 관련된 것이고 일응 타당한 면이 있으나 이 원장의 본심은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데 있기보다 법원 내지 법관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데 있은 것으로 보인다. 공판중심주의를 관철하려면 국민의 사법참여를 보장하는 배심제 등 공판중심주의가 가능하게 할 제도를 정비해야지 제도는 정비하지 않고 검찰이 작성한 수사기록이나 변호인이 제출하는 서류를 법관이 던져버린다고 관철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기록은 그 성립의 진정성이 인정되는 한 증거능력을 갖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이 잘못되었다면 이 규정의 개정을 주장하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를 관철하는 한 방법이고 또 대법원장다운 주장이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공판중심주의 이전에 법조인으로서의 양식을 의심케 한다. 이런 망발은 엄격한 의미에서 형사소송법과 헌법을 위반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탄핵의 사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원장은 구속영장을 함부로 발부하지 말 것을 강조했는데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왜 판사들이 피구속자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이름 석 자 써서 영장 발부를 하느냐’고 법관들을 질타하면서 ‘구속적부심사를 해서 2-3일안에 내줄 그 영장을 무엇 때문에 발부하느냐’고 반문했는데, 이 정도 되면 인권운동가를 능가할 만하나 시세에 영합하기 위한 위선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인신구속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을 일이지만 범죄를 다스려야 할 대법원장이 인권운동가처럼 인신구속을 지나치게 저지하면 그것은 국민을 위한 대법원장이 되기가 어렵다. 인신구속도 필요할 때는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판사라고 해서 완전무결할 수가 없다.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는 일이 없을 구속영장만 발부하려고 들면 그것은 구속해야 할 사람마저 구속하지 않게 되어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구속적부심 제도를 두는 것은 판사가 검찰의 구속영장청구서에 따라 구속영장을 발부했더라도 법정에서 심리를 해봐서 구속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 구속을 취소하기 위한 제도다. 판사라고 해서 완전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날 구속영장은 아예 발부하지 않아야 한다면 구속적부심 제도를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원장은 이 훈시에서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를 강조했는데, 국민의 공복인 법관이 국민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죄를 범한 사람을 단죄하라고 설치해둔 사법부가 국민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단죄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없다. 판사든 검사든 국민 위에 군림할 일은 아니지만 국민에게 엄격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검사와 판사에 의한 구속과 유죄판결은 사회의 안녕과 국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무죄를 많이 선고하는 판사들이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피의자나 피고인의 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것 또한 그동안 인신구속을 함부로 해온 데 대한 반작용이고 또 사법정의를 세워가는 한 과정이기는 하겠으나 이로 말미암아 피해자의 인권이 보호되지 못하거나 국민이 불안해한다면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도 이 원장의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론’과 ‘구속영장 발부 신중론’은 자칫 사법부가 범죄자에 대한 단죄를 소홀히 하는 경향으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사법부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겠다’는 자세로 일하는 것이 옳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변호사로 있으면서 너무 많은 사건을 맡아 너무 많은 돈을 벌었다는 데 있다. 그는 2000년 7월에 대법관직을 마치고 그해 10월에 변호사업을 개업해서 5년 동안에 무려 472건의 사건을 수임해서 60억여 원의 수임료를 받아 21억여 원의 세금을 내고 23억여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한다. 그가 맡은 사건 가운데 약 70%가 대법원 사건이라고 하니 ‘전관예우’를 톡톡히 누린 것이다.
그런데 전관예우와 관련하여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전관예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전관박대를 당했다’며 ‘내 경험에 따르면 우리 법관들이 전관이 사건을 가져왔다고 해서 봐주는 경우를 못 봤다. 100%까지는 아니라도 99%는 전관예우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수가 없다. 전관예우가 없다니, 그렇다면 전관예우가 왜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그가 수임한 사건 가운데 대법원사건이 70%나 되겠나? 전관예우가 없을 정도라면 더 이상의 사법개혁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 전관예우를 이용해 그토록 많은 사건을 맡아 엄청난 돈을 벌어놓고서 자기만 전관예우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법조계에 전관예우가 없다고 말하니 뻔뻔스러울 뿐이다.
그는 대법원장 취임 당시 35억 7천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는데, 주택이 3채나 되는 것도 문제지만 서초동에 있는 재건축 아파트 66평의 경우 시가가 16억 원을 넘는데도 6억 8천만 원으로 신고했고, 또 다른 서초동의 재건축 아파트 66평은 1억 6천만 원으로 신고했다. 그리고 충정동의 연립주택 40평은 2억 1천만 원으로 신고했다. 허위신고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돈이 많은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면 돈을 많이 벌수록 더 큰 애국일 수 있다. 그러나 평생 법관으로 지내다 불과 변호사업 5년 정도 하고서 100억 원에 가까운 재산을 모았다면 이것은 결코 정의에 합당할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이 사법정의를 외치고 변호사를 비난하고 서민대중의 어려움을 헤아려야 한다고 강조하니 위선의 극치일 뿐이다. 자기 챙겨먹을 것 다 챙겨먹고 옳은 말은 골라가며 하니 어찌 기회주의의 전형이요 위선의 극치가 아닐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 원장이 왜 이런 상식 이하의 발언을 했을까 싶어 이 원장의 훈시문 전문을 읽어 보았다. 한마디로 자화자찬이었고, 공판중심주의의 관철을 위한 진지한 고민은 찾기 어려웠다. 자기는 자랑이라고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자랑할 것도 못 되었다. 그가 자랑으로 내세운 것 하나를 예로 들면, 그가 맡은 대법원 사건에서 그는 ‘검사의 조서에 대해 실질관계를 다 증명해야 증거능력이 있다’는 판례를 얻어냈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거둔 성과라는 것이다. 그런 판례를 얻어낸 것은 잘한 일이지만 대법관까지 지낸 사람이 그 정도의 성과 밖에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대단한 성과라고 내세우는 것을 보면 그는 평소 법관으로 있으면서 검사의 조서에 대한 실질관계를 증명함이 없이 검사의 조서대로 재판을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법관들보다 검사의 조서를 더 많이 증거로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찌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할 자격을 갖추었다 하겠는가?
요컨대 이용훈 대법원장의 문제의 발언은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기보다 공판중심주의를 빙자하여 자기자랑을 한 것이며, 아울러 법원중심주의 내지 법관우월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