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이 쏟아져 산은 지워지고 민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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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9-11 23: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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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립(尹貞立, 1571~1627년) 관폭도(觀瀑圖).
물줄기가 흐르다 벼랑을 만나서 내려지게 되면 때론 부서져서 퍼진 물안개가 온통 뒤덮습니다. 그런 물안개는 수목과 기암들을 묽게 하고 아예 없애기도 하죠. 떨어지는 낙수도 가슴을 철렁하게 하지만 곱게 퍼진 물안개에 쌓여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닌 세상의 선경을 더 아름답다 하고 기억하는 것이겠지요.

참 좋은 그림이죠. 작은 화면에 산봉우리도 기암괴석도 없이 약간의 산등성이 아래로 떨어지는 물. 간소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그 아래서 부채질 하는 늙은이 두분, 아마도 신선이겠죠. 한 여름 더위를 식히러 폭포 앞에 나오신 것 같습니다. 누울 듯 말 듯 편하게 앉아 저 안개 속으로 시간이 잊고 계신 걸까요. 묵묵부답하고 요동하지 않는 저 곳에서 폭포 소리 말고는 세상이 얼마나 고요했을까요.

옛날 사람들이 지향했던 신선의 세상. 많은 선비들이 산 속으로 이끌렸죠. 하지만 그 이면엔 노비들이나 가마를 끌던 승려 등의 고통스러운 노고가 있었습니다. 신선인 척하기는 작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만 할 수 있었죠. 이런 산통을 깨는 듯한 말은 분위기도 해치고 쓰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죠. 옛날엔 안그랬던 것도 인간의 허욕에 의해 악스러워 지나봅니다. 정말 자연을 좋아해서 자연 속에서 온 수고를 다하고 살던 은일들의 모습은 후세 사람들에게 그들의 권력을 맛 보게 하는 한 가면이 될 수 있었던 거죠. 은일과 같이 생존에 관한 일은 하지 않지만, 온갖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 가지는 일들. 가마꾼 등 쫓아다니면서 시종을 들던 사람들은 그 선경이란 세상이 약간은 지옥처럼 보였을 겁니다. 승려가 천민이된 조선시대에서 산행을 하는 사대부들의 시종은 승려가 들었습니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국가에서 많은 역을 배정받아 착취수준으로 국가나 권력자들의 시종을 들었습니다. 가장 양반들이 즐겨 찾아왔던 금강산의 스님들은 가마를 지는 일 등으로 쉴 날이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겸재 정선 등의 금강산 그림들도 그런 노고를 바탕으로 그려진 거죠.


▲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백천교(百川橋).
백천교는 예전 금강산을 나가는 출구였죠. 선경을 한참을 노닐던 사대부들은 나가면서 아쉬움에 발길을 돌리기가 힘들었겠지만 가마를 끌고 산길을 다니며 고생했을 스님들은 한시름 놓았을 겁니다. 위 그림에서 스님들의 감정은 잘 드러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금강산을 나가는 선비들, 지금까지 시종을 들던 스님들, 이제 부터 시종을 들어야할 마을 사람들이나 관노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을 복잡 미묘한 그림입니다.

그림은 겸재의 초년 작임에도 상당히 좋습니다. 겸재가 말년으로 갈 수록 즐겨쓴 대부벽준으로 바위를 표현하였는데 중년이후 작들의 거친 대부벽준에 비해서 얌전한 느낌을 줍니다. 나무의 경우 빽빽한 전나무숲이라는 데 남방화법의 수법으로만 그렸다고 합니다. 백천교라는 제목과 달리 다리는 안보입니다. 원래는 다리가 있었겠으나 홍수로 떠내려갔을 때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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