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에게 민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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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6-03-07 01: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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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젊음은 쉽게 이해하지만 늙음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시대가 변하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름대로의 젊은 시절을 지내왔기 때문에 질풍노도의 무모한 사춘기를 이해하지만 황혼의 변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살기 때문이나 신체적 상황이 그 희망을 좌절로 안내하는 늙어가는 존재란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이 고해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지.

젊었을 때 아름다웠던 사람은 늙음으로 지워지는 아름다움에 더 고통스럽고 젊었을 때 건강하고 힘이 세었던 사람일수록 늙어 병약해지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젊었을 때 총기발랄했던 사람이 그 총기를 잃어갈 때 더욱 절망하고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러한 이러한 고통을 젊은이가 미리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가슴은 저만치 멀다.

나는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이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양쪽의 관심사가 다르고 서로에게 요구하는 바가 너무 차이가 난다. 여기에는 서로 합리적인 양보점이란 없다. 단지 인내뿐이다. 노인들의 마음은 과거의 기억들로 인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거울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선사들은 거울의 때를 닦아내 듯 축적된 과거의 마음으로 살지 말라고 한다.

한편 젊은이들의 마음의 거울이란 울퉁불퉁 그 표면이 고르지가 않다. 그래서 자기마음 자기도 모르는 것이다. 늙으나 젊으나 자기마음 자기도 모르는 것은 매 일반이다.

한 예로 TV를 시청할 때도 그 선호도 다르지만 같은 드라마를 볼 때도 한 쪽은 매우 집중해서 보나 노인은 한 장면으로 야기된 자기 생각을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 한다. 드라마의 반전도 결말도 모두 그의 혀끝에서 끝나 버린다. 결국 드라마는 눈앞에 지나쳐 버리고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TV를 한개 더 들여다 놓게 되고 같은 드라마를 서로 다른 공간에서 보는 일이 생긴다.

쇼 프로그램을 볼 때도 그렇다. 가수 설운도가 한 번 몸을 돌리는 모션이 너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설운도가 나오면 설운도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 언젠가 당신께서 본 설운도의 가정사가 쭉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도 없이 들은!!



노인들의 삶이란 이미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이다. 그 회상은 그 경험들은 이미 수도 없이 말 되어졌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더 듣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를 젊은이들이 인내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늙을 것이고 그들의 삶도 곧 지루해질 것이다. 그들도 불타는 삶의 한 때를 가져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을 것인가? 내 늙어질 것이 두려워 노인들의 삶에 대한 무한한 인내를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인생은 반복한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타인으로 인정 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같다. 관심은 왠지 좋고 하고 싶다는 감성적 집중이다. 집중을 해야 몰입이 되고 몰입을 하는 순간 비로소 삶을 사는 것이다. 양치질을 할 때도 집중을 해서 오직 양치질만 해보라. 그 신비한 체험은 바로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양치질을 하면서 벌써 생각은 양치질을 끝내고 할 다른 일이나 또는 이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까지 살면서 전적으로 몰입한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우리는 생활을 하긴 하지만 삶을 산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소외된 계층과 마찬가지로 노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일부분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스템적 관심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듣고 또 들은 얘기, 그리고 새로운 화제가 하나 나왔다고 하더라도 곧 핀트가 달라지는 스토리들은 그야말로 허무개그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이해되어 선택하지 않는 참음이 강요되는 사회 문화적 압력에 매우 반대를 한다. 이는 형벌이다. 누군가가 내게 상담을 요청하면 나는 참아라는 말을 절대 안한다. 그가 처한 상황은 얘기를 듣는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되어지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해주는 조언은 있다. 그의 무지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상대는 이해되지 못할 짓을 하고 있으나 나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을 짓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는가? 노인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무지와 신체적 반응이 늦어지는 것 등이 진정 이해되고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때는 강요가 아닌 아름다운 자기선택이 된다.

곱게 늙어가고 싶은 것은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기대치일 것이다. 누구든 곱고 우아하게 늙고 싶다. 이는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치열함에서 벗어난 그저 <자신>이 빠진 채로 귀가 부드럽고 눈이 너그럽고 그리고 입이 향그러운 그러한 성숙을 기대하는 것이다. 강렬함을 잃었지만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고 싶은 황혼처럼...

서쪽으로 져야 하는 해가 자기 존재가 보여 지지 않을 것이 두려워 악을 쓰기 것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황혼일 것인가? 나는 삶은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인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은 스스로가 그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 가능하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홀로서는 삶, 혼자 있어도 좋을 삶이 준비되지 못하는 늙음이 바로 지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아야 하고 자기 내면의 깊은 고독을 맞이할 용기와 정직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적이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어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에 대한 이해가 타인에게로 확대되는 자기 확장의 삶이 되지 못한다면 이는 잘못 늙어가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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