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둑 아래 홀로 핀 노란 꽃 하나
아무도 못보는 노란꽃 하나
엄마 아빠 어디다 잃어버리고
외로이 피어있나 노란 꽃 하나
기억이 다소 아물거립니다. 내가 자주 부르던 동요인데 가사에 자신이 없습니다. 작고 노란 꽃을 보기만 하면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꽃에 이입된 자신의 처지일까요?
길을 가다 문득 블럭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노란꽃 하나에 전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생명에의 전율이라고 할까요. 나는 그 꽃에 경외와 미소를 보낼지언정 만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가 좋다고 만지면 그 꽃은 다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결벽 때문이죠.
5월 1일은 프랑스의 어머니 날입니다. 그 때 남자들과 아이들은 어머니는 물론이고 지금은 모든 여자들, 이웃집 남자가 이웃집 여자들에게도 꽃을 줍니다. 우리는 은방울꽃이라고 부르는 <무게> 라는 꽃을 주는 날입니다. 그들은 이 꽃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습니다. 아이와 숲을 거닙니다. 은방울꽃을 발견하면 서로 뛰어가 꽃을 따줍니다. 귀에도 꽂고 그렇게 모아진 꽃은 물컵에 담아 둡니다. 향기가 좋습니다. 특별한 날 꽃을 주고 받음으로써 사람과의 관계가 꽃만큼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희망해봅니다.
내 딸아이는 꽃을 보면 꼭 따고 싶어 합니다. 꽃을 따서 엄마에게 주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 꽃 따지 말고 우리가 좀 더 여기 서서 보고 가면 안될까? 다른 사람들도 이 예쁜 꽃을 보면 좋겠지? 꽃도 더 오래 그 자리에 있고 싶을 지도 모르고...>
아이가 내 말에 수긍을 합니다.
<넌 내게는 정말 꽃보다 예쁜 아이란다.>
우리는 포옹을 합니다.
<나는 내가 네 엄마인게 정말 운이 좋아.>
몇 해전의 일이군요. 공원에 간 아이는 내가 그렇게 잡지 말라는 금붕어를 아빠와 함께 잡아서 비닐 봉지에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자신을 하더군요. 잘 키우겠다고... 아이의 자신감에는 남편의 지원사격이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생물학자가 되고 싶다고 주는 돈을 열심히 모아 현미경을 샀다던 남편입니다.
아이는 눈만 뜨면 금붕어에게로 달려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학교에서 돌아오자 마자 금붕어 물을 먼저 갈아주고 나서야 간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금붕어가 죽었습니다. 자고 일어난 아침에 발견된 것입니다. <엄마 금붕어가 이상해요. 움직이지 않아요.> 아이는 금붕어가 죽은 것을 알지만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봐, 그렇게 놓아주라고 했잖아! 이제 너 더이상 금붕어 잡을 수 없어, 알았지?>
나는 화를 버럭 냅니다. 아이는 울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있습니다. 금붕어를 죽인 죄책감과 그리고 화난 엄마에게 얼마나 닥달을 당해야 할 것인지에 겁이 나기도 했겠죠.
<아빠께 전화해!>
출장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게 합니다. 남편도 상당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죠.
<엄마, 아빠가 오늘 올 때까지 기다리래.>
남편은 아이와 함께 집 가까운 공원 나무아래 묻어주고 왔습니다. 자책하며 아이가 울더랍니다. 좀 좋은 말을 해주라고 내게 아양을 떱니다.
<금붕어가 너로 인해 더 오래 살았는지 더 일찍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한 번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죽으니까... 그래도 금붕어가 제 살던 연못에 있었다면 더 잘 살았을 것 같긴 하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가 금붕어라면 어땠겠어? 우리가 금붕어와 말을 통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치? 금붕어와 말을 통할 수 없는게 네 잘못은 아니긴 하지만...>
<누구든 실수 할 수는 있어. 실수인 것을 알고 고치면 훌륭한 일이라고 선생님이 말했어, 엄마?>
아이는 금방 잘난 척하며 내 가슴에 안깁니다.
<엄마도 잘 몰라. 그런데 엄마는 있던 자리에 두고 바라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응!>
아이가 내 말 뜻을 알아들은 듯 대답합니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열심히 설명해주면 그 에너지가 전달이 됩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죠.
<저기다 묻었어.>라고 공원을 지날 때마다 말을 하곤 하다가 언제부턴가 무심히 지나치게 되었지만... 꽃보면 만지고 싶다고 남자들의 변명아닌 변명에 생각난 일화들입니다.
꽃보면 만지고 싶고 꺽고 싶다는 마음은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런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싶다.>그까지만 그의 순리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지고 싶은 그 여자는 그의 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와 꼭같은 자유의지를 지닌 그 여자가 꽃이고 싶은 대상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잘못을 한 사람은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자신은 잘못해놓고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잘못하기를 강요하지 않았질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