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신문스크랩 20년 민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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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7-02-08 05: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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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머님은 78세 생신을 맞이하셨습니다. 때마침 어머님에 대해 쓴 글이 단행본 <어머니>에 실려 출간되었기에 어머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새해 첫 일기에 그 글을 싣습니다. 제목은 '어머님의 신문스크랩 20년'입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당 못할 무게감 때문에 감히 꺼내 읽지 못하는 글들이 있다. 1980년대 말 노동운동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님이 보내주신 174통의 편지, 지난 20년 동안 아들과 함께 하기 위해 손수 만드신 스무 권의 스크랩북이 바로 그것이다.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시민들의 봉기가 좌절하는 과정을 보며 나는 오랫동안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신반대운동으로 시작한 학생운동을 떠나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대학교졸업과 더불어 친구들이 외국유학 가거나 대기업에 취직할 때 일당 5천원의 용접기능사로 보일러회사에 취직하였다. 아직 위장취업자란 말도 생겨나기 전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 노동운동으로 투신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고향친구나 가족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2, 3년이 지나자 더 이상 <이실직고>를 하지 않고 버티기 어려웠다.

부모님을 만나 다 털어 놓았다. 외국유학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장남이 용접공으로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알려졌다. 앞으로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해 나갈 것이며 장남으로서 역할을 못하게 된 것은 죄송하지만 노동운동은 자랑스런 직업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은 크게 실망하셨고 어머님은 매우 놀라셨다.

그 후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미행, 체포, 고문 따위를 걱정하던 시절에도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7년간의 수배와 2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1992년 사회로 복귀한 후 나는 노동운동의 연장으로서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하여 십 여년만에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렀다.

부모님께 청천벽력 같은 <이실직고> 이후 정권이 4번 바뀌고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부산에 계시는 어머님께서 무거운 소포를 하나 보내주셨다. 열어보니 신문기사 스크랩북이 모두 열권이었다. 1년에 한권씩 10년의 세월에 걸쳐 만드신 것이다. 어머님은 스크랩북 첫권의 맨 앞면에 이렇게 써놓으셨다. <왜 하필 이 길을...>

어느 날 갑자기 고향집을 방문한 아들로부터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길을 걷겠다는 <이실직고>를 들으신 다음날부터 어머님은 아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도대체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운동의 현실이 어떤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기사를 빠짐없이 읽고 관련기사는 오려놓고 두 번, 세 번 읽으시고, 책방에 가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도 구해다 읽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년에 한권씩 십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 열권의 스크랩북으로 완성되어 갔다.

사실 그동안 부모님께는 자식된 도리를 제대로 다하지 못한다는 죄송함만 가슴 한 켠에 접어둔 채였다. 수배신분을 핑계로 몇 년째 고향도 찾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만 매몰되어 십 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동안 어머님은 못난 자식이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노동관련 기사를 오려가면서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을 아들과 함께 하려 노력해온 것이었다.

왜 하필 이 길을 가려하느냐는 원망과 한탄으로 시작된 스크랩은 세월이 쌓이면서 자식이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이해와 애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스크랩북 곳곳에 쓰신 짧은 글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두렵지 않다는 심정으로 마치 어렵고 힘든 일을 혼자 다 짊어진 양 고군분투하는 동안에도 실은 어머님의 사랑과 성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이 스크랩북을 보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일년쯤 후 어머님은 새로운 십년간을 모아 만든 스크랩북 열권을 또 보내오셨다. 1992년 감옥에서 나와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하자 어머님의 스크랩기사도 노사문제에 진보정치 관련기사가 더해지고 있었다. 유럽 좌파정당들의 선거결과 기사가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실태에 관한 특집기사가 오려 붙여져 있었다. 외로운 가시밭길을 걷는 아들과 동행하려는 모정이 20년간 계속되어 온 것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20년 세월의 손때가 묻은 어머님의 스크랩북은 지금 서가 한쪽에서 감히 다시 열어보지 못하는 상태로 놓여있다. 열어볼 엄두는 내지 못하지만 가끔 그 스크랩북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진다. 이제까지 혼자서 역경을 무릅쓰며 왔다고 생각한 길이 결코 혼자서 온 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저 스크랩북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님이 정성껏 오려붙인 스크랩북의 기사들은 어머님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 길이 만들어 왔다는 또 하나의 진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스무권의 스크랩북을 만드는 동안 어머님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으로 늙으셨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소중한 성과로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으로서 46년만에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많은 해결과제를 앞두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기본권은 세계적으로도 열악한 상황이다. 그래서인가. 스무권의 스크랩북을 보내주신 이후에도 어머님의 스크랩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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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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